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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법 – 스스로 自, 그러할 然
신(神)은 과연 존재하는가?
1,2차 세계 대전을 겪고 나서 특히 아우슈비츠수용소에서 600만 유대인의 대학살을 본 철학자들은 신(神)은 죽었다고 외쳤다. (신이 있다면 어찌 저런 끔찍스러운 일을 두고 본다는 말인가!)
“아우슈비츠 이후의 모든 문화는, 그 비판까지도 포함해서 한낱 쓰레기에 지나지 않는다.” – 아도르노(1903-1969) “이 시대는 옛 신(神)들이 다 죽었고 새 신(神)들은 아직 탄생하지 않았다.” – 하이데거(1889-1976)
근대 이후 서양의 종교적 상황은 한마디로 신(神)의 부재와 실존주의 철학의 등장이다. 그렇다면 신(神)은 없는 것인가? 기존(旣存)의 신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유대교에서는 야훼를, 그리스도교에서는 하나님을, 이슬람교에서는 알라를 유일신이라 하는데 과연 이 신들은 각각 다른 것인가? 동양에서 말하는 상제(上帝), 천(天), 신(神)은 무엇이며 우리나라 애국가에 나오는 하느님은 또 무엇인가?
인류의 수 천 년 역사 속에서 그 이름은 달라도 우리 인간은 신의 존재를 믿어왔음에 틀림없다. 다만 시대에 따라 신과 인간과의 관계에서 어느 쪽에 더 우위를 두느냐 하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주역(周易)의 신(神)과 사람인(人)관계를 살펴보면
하늘에서 모든 것을 주재하고 관장하는 ‘높이의 신’(民神相分 단계)에서 인간의 노력을 더 중시하는 ‘변화의 신’(民神相通 단계)으로, 그리고 신(神)의 신명(神明)과 인간의 신명(神明)을 합일(合一)하는 ‘깊이의 신’ (民神合一 단계)으로까지 발전한다.
나는 종교가도 철학자도 아니고 또 신(神)에 대해 아는 것도 부족하지만 신(神)의 존재를 분명 믿고 싶다. 다만 그 신(神)의 법(法)을 ‘자연(自然)’이라 부르고 싶다. 자연(自然)은 한자로 ‘스스로 自’와 ‘그러할 然’이 합쳐진 말이다. ‘스스로 그러한’ 시스템, 다시 말해 자동 피드백시스템이다.
하느님(God)이 어떻게 하늘나라에서 이 억조창생(億兆蒼生)들의 일거수 일투족까지 살펴서 복을 주고 화를 줄 수 있겠는가? 착함을 행하면 마음이 흐뭇해지고 밝아지고, 악함을 행하면 양심의 가책을 받아 가슴이 두근거리고 초조해지는 것이 바로 ‘스스로(自), 그러한(然)’ 자동 시스템이 아닐까?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여름이 지나면 가을, 겨울이 오는 것도 천지자연(天地自然)의 자동시스템이요, 비가 오고 눈이 내리고 폭풍이 몰아치는 것도 다 그럴 수밖에 없는 연유가 있어서 스스로 그렇게 되어 지는 자동 시스템이다. 그래서 ‘세상엔 나쁜 날씨란 없다’고 한다.
이 대자연(大自然)의 무궁한 조화와 오묘함을 보고 느끼려면 미국의 그랜드캐년을 가보라!
그랜드캐년은 길이가 445.6km나 되며 평균넓이는 16km, 깊이가 1,600m나 된다. 과거 500만년 동안 흐르는 물에 의해 쉴 새 없이 깎이고 깎인, 과거 20억년까지 이르는 암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캐년의 깊이는 콜로라도 강에 의하여 침식되어 왔고, 그 넓이는 얼음이 얼고 녹는 주기, 나무뿌리에 의한 쐐기 작용, 중력, 빗물과 토양의 결부에서 기인하는 화학적, 기계적 풍화작용의 결과인 것이다.
이 아름다운 대장관을 사람들은 신(神)이 만든 위대한 작품이라고 일컫는다. 그러면 이 작품을 만들기 위해 신(神)이 어떤 의지를 가지고 만든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아닐 것이다. 해(日)와 달(月), 하늘과 땅의 음양조화와 지수화풍(地水火風), 춘하추동 사시절기(四時節氣) 기후변화의 자연작용이 결과적으로 이런 작품을 만든 것이다. 말 그대로 ‘스스로(自), 그러한(然)’ 자연 시스템의 산물인 것이다.
이 우주는 이러한 자연(自然) 시스템이 있어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운행되고 있다. 인간사회도 이러한 자연(自然)시스템이 있어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성훈에 이중천지입법(二重天地立法)을 밝혀 주셨다.
“ 천지(天地)에는 신명(神明)의 밝음이 있고〔天地有神明〕
인생(人生)에는 심명(心明)의 밝음이 있다.”〔人生有心明〕
천지에는 신명의 밝음이 있어 이 우주 자연을 관장하고 계시고,
만물의 영장인 인간에게는 신(하느님)이 인간의 영심 속에 파견 나와 계시는 것이다. ‘한량없이 맑고 고요하고 바르고 둥근 마음’ 그것을 영심(靈心) 이라고도 하고 내 안에 있는 부처, 자성존불(自性存佛) 이라고도 한다. 이 인간 속에 내재된 신이 나의 생각하는 것, 말하는 것, 행동하는 것을 모두 다 보고 심판하고 계신다. 그래서 어디에 빌 것도 없고 물을 곳도 없다. 내 안에 있는 이 심명(心明)이 자연시스템으로 무궁한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 착하게 행하면 착함이 오고, 명기(明氣), 악하게 행하면 악함이 오고, 초기(焦氣).. 」
「적선지가(積善之家)에는 필유여경(必有餘慶)이요, 적악지가(積惡之家)에는 필유여앙(必有餘殃) 이라…」
「순천지자(順天地者)는 흥하고, 역천지자(逆天地者)는 망하나니…」
「인생과보(人生果報)는 내가 지음으로써 내가 받느니라.
내 착함도 자연(自然)이 알아주고, 내 원한도 자연(自然)이 풀어주며 만사이치는 사필귀정(事必歸正) 이니라.」
「천당 극락 지옥은 재하처(在何處)요 각자 중심(中心)이니, 인생은 만물지영장인 고로 생존에 개심수덕(改心修德)하여 심전(心田)을 청정정심하면 즉 천당 극락 이니라」(이상 성덕명심도덕경)
이 모든 성훈의 말씀이 다 심물문리(心物文理)로 철(哲)한 자연의 이치법을 밝혀주신 것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이 다 자연(自然) 아닌 것이 없다.
원인(原因)이 있어 나타난 결과(結果)요,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자동시스템이 자연이기 때문이다. 국가 사회의 흥망성쇠도 다 자연(自然)이요, 개인의 부귀영화(富貴榮華)와 길흉화복(吉凶禍福)이 다 자연이다.
우연이란 과연 있는 것인가? 우연이라는 것이 겉으로 보기엔 우연일 뿐이지 그 내면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을 것이니 그 우연은 필연(必然)일 것이다.
나에게 부딛쳐 오는 모든 것이 다 필연(必然)이라면 그것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화도 될 수 있고 복이 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악함으로 받아들이면 화가되고 착함으로 받아들이면 복이 되지 않겠는가?
마치 흐르는 물이 부딪쳐오는 모든 것을 착함으로 받아들이듯이 내게 부딛쳐 오는 모든 것을 긍정으로 받아들이자. 좋은 일이건 궂은 일이건, 설사 억울한 일을 당했어도 그것 또한 자연(自然)이니 누구를 원망하고 한탄 하겠는가?
이런 것도 자연(自然)이요, 저런 것도 자연(自然)인 것을.
이런 것도 착함으로 화(化)하게 하고, 저런 것도 착함으로 화(化)하게 하자. 선화아물 자연지족(善化我物, 自然之足) 하여 보자. 그것이 선(善) 중에 최고의 선(善), 최선(最善)이다.
자연은 한품에 만물을 품어 고이고이 길러 주신다.
돋는 일월(日月)을 막을 수 없고 자연운도를 막을 자 없다고 하였다.
자연은 위대한 신(神)이며 그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자연(自然)앞에 순명(順命)하고 자연을 경외(敬畏)하며 자연(自然)대로 살아야한다.
성훈에 원형의정(元亨義貞)은 천도지법(天道之法)이요 인의예지(仁義禮智)는 인성지강(人性之綱)이라 하였다. ‘인의예지는 사람이 살려고 하는 본성의 벼리’ 라 하였으니 인의예지(仁義禮智)를 벼릿줄로 삼고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 바로 자연(自然)대로 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