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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형과 유형(색과 공)
無形則有形(무형즉유형)이요, 有形則無形(유형즉무형)이라 형상이 없는 것같으나 형상이 있고 형상이 있는것 같으나 형상이 없느니라
*유형이 곧 색이요,무형이 곧 공이라. 사리자여 색(色)이 공(空)이요, 공(空)이 색(色)이니라,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느리라. 그러므로 생(生)이 곧 사(死)요, 사(死)가 곧 생(生)인것이다. 이글은 형상과 무형, 삶과 죽음같이 이분적인 상대개념을 척파하는 내용이다.
색(色)이란 육감으로 느낄 수 있는 제반 현상을 말한다. 이를테면 산,소리, 냄새, 등 대표적인 것으로는 눈으로 볼수 있는 형체 있는 것들이다 그 형상이 실제로는 허공과 같다는 이야기다. 예를 들어 책상을 두고 “이것은 없는것과 같다” 라고 얘기한다면 얼핏 미친 사람 취급받기가일쑤다, 그러나 요즘 과학문명도 이것을 인정하고 있다. 물질을 쪼개고 쪼개고 쪼개서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입자(粒子)에 이르면 형태는 사라지고 다만 진동만이 존재한다고 한다,
즉 에너지만이 있다고 한다. 그 에너지파동은 기운에 불과한데, 그것은 관찰하는 사람의 생각대로 움직여진다고 한다. 현대의 최첨단 과학자들이 천신만고 끝에 결론 내린 공(空)의 개념을 상식으로 인식되어왔다, 즉 색이 공(空)인동시에 공 역시 색(色)인것이다. 어떤 환경의 변화가 주어지면 텅빈 허공가운데서 기운이 뭉쳐져 새로운 형체가 생성되는것이다.
그 래서 색이 즉 空 이요 공이 바로 色이다. 과학자들이 분석해서 이것저것 따져서 결정지은 것은 분석공(分析空) 이라 하고 지혜의 눈이 열린 차원에서는 분석하는 과정없이 바로 공(空)을 체득한다. 그래서 즉공(卽空) 이라 이름한다. 여기에 무슨 창조니 심판이니 하는 말들이 끼어들 여지가 있겠는가! 색(色) 이 공(空)이기에 블랙홀이니 화이트홀리니 하는 개념도 이해가 가는 것이다.
지구같은 거대물체가 블랙홀이라는 어느 공간에 도달하면 탁구공 만하게 축소된다는 이야기, 그러나 이 내용 역시 ‘색즉공’ 개념에는 이르지못한다. 이쯤되면 우리 인간의 사고가 어디까지 이를까 의심해보지않을수없다. 명예를 위해,부를 위해, 정의 실현을 위해 우리는 부단한 일생을 보낸다. 부의 목적, 정의의 개념, 명예의 경중을 어디에다 기준을 둘 것인가?
일생의 동반자인 나의 육체가 허공과다르지않다면 나는 무엇이며, 죽음이라는 것은 또 무엇인가, 삶과죽음의 정의는 무엇이며 또경계선은 어디인가, 육체의 유무(有無)와 관계없이 존재하는 것이 있다면 우리의 ‘정신’ 이 그것이라 할까? 그러나 정신이라고 하는 마음의 실체는 무엇인가? 색깔이나 형태가 있는가. 칼로 무베듯이 벨 수 있으며 불에도 탈수 있는 물건인가? 거울 앞에서 자신의 눈동자를 자세히 보라. 형태고 색깔도 아닌 반짝이는 그 무엇이 나를 응시하고 있다,
슬픔도 기쁨도 술 취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말갛게 나를 주시한다. 그것의 정체가 뭘까? 그것은 육체의 유무와는 관계없다. 그래서 ‘죽음도 삶도 초월했다’ 고 한다. ‘죽음‘을 인정하면 삶과 분리해서 생각하기 때문에 굳이 죽음이 없다고 표현한 것이다. 육체적인 관점에서의 죽음은 엄연히 존재하지만, 더 넓은 의미인 반짝이는 눈 빛의 자리에서는 죽음도 삶도 아닌 초월만이 빛나고 있다.
무형 무형 깨달기 위해서, 수많은 수도자 들이 고행수도를 하고 있는것이다. 그것은 조그마한 겨자씨가 우람한 나무를 탄생시키는 이치를 찾는 작업이다. 어떻게 깃털처럼 보잘것없는 맨드라미씨에서 그렇게 화사한 꽃이 피어날 수 있는가? 조그마한 씨앗이 거대한 나무를 그대로 안고있다기보다, 씨앗 속에 나무의 모든 거억들을 간직하고 있다는 결론이다, 바로 공(空) 가운데서 색(色)을 창출했다고 할 수 있다.
즉 현상없는 ‘씨앗’ 이라는 기억 속에서 우람한 나무라는 ‘현상’을 유출해낸것이다. 무형과 유형(색과 공)
생명은 모두 이와 같다. 없는 것 같지만 있고, 있는 듯 하지만 텅빈 존재다. 형상 있는 것은 불에 탈 수 있지만 형체 없는 허공이나 기억들은 물 . 불을 상관하지 않는다. 그와 같이 우리도 육신이라는 형상이 있기에 즐거움도 뜨거움도 고통도 가할 수 있다.
생명은 모두 이와 같다. 없는 것 같지만 있고, 있는 듯 하지만 텅빈 존재다. 형상 있는 것은 불에 탈 수 있지만 형체 없는 허공이나 기억들은 물 . 불을 상관하지 않는다. 그와 같이 우리도 육신이라는 형상이 있기에 즐거움도 뜨거움도 고통도 가할 수 있다.
그래서 천상 락(樂)이 존재하고 지옥고(苦)가 있다 그러나 형상을 초월한 눈빛의 세계는 천상락이나 지옥고에 상관없이 여여(如如)하다. 어떤 귀신이 있어 우리를 괴롭히거나 도움을 준다는 것도 형상있는 차원에서의 말이지 그 이상은 관계할수 없다. 그 눈동자의 빛은 우주 생성 이전에도 그랬고, 지구가 핵폭탄에 의해 산산이 부서진대도 전혀 상관이 없는 세계다.
하물며 조물주가 있어 창조했으랴! 공 한 가운데 있고, 있는 가운데 텅 빈 그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한가한 나그네가 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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